평신도와 성직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평신도’라는 말에 익숙합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평신도’라는 말이 없습니다. 초대교회(1~2세기) 시기에는 평신도와 성직자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클레멘트가 ‘라이코스’라는 성경에 없는 단어를 만들었고, 그 이후 중세시대를 거치면서 교회 안에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계급구조가 고착화되었습니다. 이후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을 강조한 종교개혁 운동을 통해서 구원론의 회복이 이루어졌고, ‘만인제사장설’로 성직자와 평신도의 계급구조가 깨어졌습니다. 이원론적인 구분이 없어졌습니다. 하지만 개신교 내에서는 여전히 목회자는 마치 중세시대의 사제 또는 구약 시대의 제사장과 같은 사람이라는 느낌이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직자로 불리거나 평신도로 불리거나 하나님 앞에서는 똑같은 신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는 ‘제사장’입니다(만인제사장설).
하지만 하나님은 성도들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온전히 세우기 위해서 ‘전임사역자’를 세우셨습니다. ‘사역’ 또는 ‘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일하도록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즉 목회자나 성도나 모두가 다 일을 해야 합니다(벧전 4:10; 롬 12:4-8). 그러면 모든 사람이 해야 할 일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여기에는 ‘차별’이 아닌 ‘구별’이 있습니다. 목회자들은 주로 교회에서 목회 사역을 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성도들은 각자의 은사를 따라 세상에서 생활하고 일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도록 부름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전임사역자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맡긴 각자의 무대에서 모두 주인공이라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오바댜’라는 인물은 우상을 숭배했던 아합왕의 측근 신하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악한 왕의 신하로서 자신의 일을 속히 그만두고 엘리야 선지자에게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직장인 이스라엘의 궁궐에 머물면서 엘리야 못지 않은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그는 이세벨 왕비가 선지자들을 학살할 때 100명의 선지자를 살렸습니다.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나병에 걸린 나아만 장군의 무명 여종이 등장합니다. 그녀는 비록 고달픈 포로 생활을 했던 비천한 몸종이었지만, 이 여인은 나아만 장군의 나병을 고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어 이방 사람들의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 귀한 역할을 했습니다. 신약 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과 동업을 했던 사업가들이자 바울의 선교사역을 도운 브리스길리와 아굴라 부부가 나옵니다. 그들도 역시 대표적인 평신도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볼로라는 유대인 설교자가 에베소에 와서 설교했을 때, 그를 초청해 부족한 부분을 가르쳐 양육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맡겨진 일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청지기가 됩시다.